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 전투 (문단 편집) ==== 제4차 평양성 전투 ==== ||<-3><:> {{{+1 '''제4차 평양성 전투'''[br]第四次平壤城戰鬪}}} || ||<:> '''시기''' ||<-2>1593년 2월 6일 ~ 9일[br](음력 1월 6일 ~ 9일) || ||<:> '''장소''' ||<-2>조선 평안도 평양성 || ||<:> '''교전국''' ||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width=25]] [br] 명나라 [[파일:400px-Left-facing_dragon_pattern_on_Wanli_Emperor's_imperial_robe.svg.png|width=25]] ||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width=25]] || ||<:> '''지휘관''' || '''[[류성룡]]'''[br][[김명원]][br]김응서[br]정희현[br][[이시언(조선)|이시언]][br]'''[[사명대사]][br][[휴정(조선)|서산대사]][br][[이여송]]''' [br]이여백 [br]양원 [br]장세작 [br]오유충 [br][[이령]] [br]조승훈 || '''[[고니시 유키나가]]'''[br]고니시 요시치로†[br]고니시 안토니오†[br][[소 요시토시]][br]마쓰라 시게노부[br]아리마 하루노부[br]오무라 요시아키[br]고토 스미하루[br]히비야 아고스트†[br]마츠우라 사다무†[br]히다카 코노무† || ||<:> '''병력''' ||조선 8,000명[br]승병 2,200명[br]명 43,000명[br]총 병력 53,200명||약 16,000명 || ||<:> '''피해''' ||5800명 전사[* 5천 ~ 6천 정도로 추정] ||1200명 전사,5000명 부상[* 후퇴 과정까지 9천 정도로 추정. 평양성 전투에서 피해가 얼마인지는 기록이 없으나 고니시의 1군이 한양으로 후퇴한 뒤 6,60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기록은 있다. 이는 일본측 기록이다.] || ||<:> '''결과''' ||<-2>'''조명 연합군의 승리''', 평양성 탈환 || [youtube(kZ7tXJCq0gw, start=210)] 4차례의 평양 전투 중 '''가장 규모가 큰 대전투'''이다. 조승훈의 1차 원군이 패전하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대군을 파견할 필요성을 느낀다. 마침 보하이의 난이 진압되었기에 명나라는 북방 주력군이었던 요동군을 파병하기로 하고 경략 송응창을 최고 사령관, 제독 이여송을 현장 총지휘관으로 삼아 43,000명의 군사를 주어 2차 원병으로 조선에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그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해 유격 장군 심유경을 보내 휴전 협상으로 시간을 끌게 하였다. [[1593년]] [[1월 15일]]([[1592년]] [[음력]] [[12월 13일]]) 명나라의 첫 선봉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고 1월 27일(음력 12월 25일) 이여송의 주력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선조가 있던 의주 용만관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에서도 명군의 보급을 담당하고 도원수 김명원과 평안우방어사 김응서, 좌방어사 정희현 등 총 8,000명의 군사를 주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승병 2,200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봉산에 주둔한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오토모는 이를 거절하고 한양 방면으로 철수하여 일본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오토모 요시무네]]는 기독교 다이묘로 유명한 오토모 소린의 아들이다. 결국 이 전투에서 고니시를 돕지 않은 것이 보고되어 개역당하고, 가문의 영지는 모두 히데요시의 직할지로 편입되었다. 오토모가 고니시 유키나가가 전사했다는 오보와 가신들의 반대로 인해 고니시를 지원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고, 그냥 알면서도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얘기도 있다.] 결국 독자 방어에 나서게 된 고니시 군은 성 방어를 위한 일본식 시설을 만들어 평양성을 최대한 요새화하고, 모란봉에는 2,000명의 조총 부대를 배치시켰다. 1593년 2월 6일(음력 1월 6일)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 서쪽 외성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모란봉, 칠성문, 보통문을 공격하고 이일과 김응서는 함구문을 공격하기로 했다. 명나라의 부총병 오유충과 조선의 승병 부대가 처음으로 공격을 시작해 거짓으로 패한 척 후퇴하다가 다시 반격하여 승리했다. 하지만 조선군 8,000명이 남쪽 함구문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2월 7일(음력 1월 7일) 새벽 일본군 3,000명이 명나라의 좌군 부총병 양호, 중군 부총병 이여백, 우군 부총병 장세작 등의 진지에 기습 공격을 가했으나 명군이 이를 물리쳤고, 조명 연합군은 본진을 보통문 앞에 전진 배치하고 정희현과 김응서의 기병대에게 일본군을 유인하게 했으나 일본군은 속지 않았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2일 동안 탐색전을 하여 일본군을 관찰하다가 2월 8일(음력 1월 8일) 대공세를 가했다. 명군이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 수많은 대포로 평양성을 집중사격하고, 외성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의 조승훈과 조선의 이일, 김응서가 이끄는 8,000명이, 칠성문은 장세작이, 보통문은 양호가, 모란봉은 오유충과 사명대사의 승병 2,200명이 공격에 나섰다. 양측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오유충은 적의 탄환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을 독려하고 이여송도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음에도 태연히 다른 말로 갈아타 군사를 지휘해 사기를 올렸다. 조명 연합군이 외성과 읍성을 함락시키고 중성으로 돌입해 일본군을 만수대와 을밀대로 압박했고 일본군은 풍월정에 토굴을 쌓아 올려 최후의 공격을 가하며 저항했다. 격렬한 전투로 양측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이여송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철수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명군의 피해가 매우 컸다고 기록되어 있다. "적이 안에서 탄환을 쏘았는데 맞아 죽은 명나라 군사의 시체가 서로 잇따랐고 제독이 탄 말도 탄환에 맞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제독에게 조금 후퇴하여 군사들을 휴식시키기를 청하였다. 포시(晡時)에 제독이 적의 굴을 함락시키기 어렵고 많은 군사들이 주리고 피곤하다고 하여(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1일 병인 13번째기사)"]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맺어 추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뒤 이날 밤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명군의 참장 이녕이 군사 3,000을 이끌고 추격에 나서 적군 358명을 사살했고 조선군도 추격에 나서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60명, 황주 판관 정화가 120명 등 총 538명을 사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